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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문학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경외

  • pastortkim
  • May 12, 2016
  • 8 min read

지혜문학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경외

Taylor Kim

유대 학자들과 개신교 학자들은 욥기, 잠언, 전도서 그리고 솔로몬의 아가를 지혜서로 간주하는 반면, 카톨릭 학자들은 경외전의 제1서(벤시락의 지혜서)와 솔로몬의 지혜서를 추가한다. 이 모든 그룹의 학자들은 이 4권(혹은 6권)의 책에다가 시편 일부를 더하기도 한다.

구약의 지혜문학들을 살펴보면, 지혜운동은 이스라엘 주변의 선진국에서 발달했고, 솔로몬이 수입하여 발전시켰으며, 지혜가 이스라엘 신앙으로 동화되어가는 과정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가졌던 지혜의 가장 핵심적 요소는, 고대 근동의 다른 지혜들과는 달리 지혜는 이성의 힘으로 찾아내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다.

잠언은 지식을, 욥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전도서는 삶의 의미를, 시락은 성례전승의 연속성을 추구하며 그 지혜에 대해 탐구해 나간다. 잠언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존속할 수 있게 하는 질서를 만든 태초의 시간에 초점을 맞추며, 욥기의 관심사는 의인이 고난받는 현재에 관련된다. 전도서는 인간이 분별하지 못하는 미래사에 관심하며, 시락은 영광스러운 과거를 돌아본다. 이처럼 각 지혜문학들은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고 초점을 맞추고 있는 대상이 다르지만, 모든 지혜 탐구는 인간을 찾는 하나님으로 귀결되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정의함에 있어 이처럼 다양한 접근법에 의해 얻어지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형식의 측면에서 볼 때 지혜는 격언문장이나 가르침, 논쟁, 지적인 반성 등으로 이루어지며, 주제의 측면에서 볼 때 지혜는 인간 복지를 위해 삶을 다스리는 것에 관해서 취급하는 자명한 직관들, 무죄한 고통에 관한 삶의 비밀을 추구하는 일,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고민, 창조 질서 안에 감추이고 지혜 안에 드러난 진리를 추구하는 일 등으로 구성된다. 이상을 볼 때 분명해지는 것은 형식과 내용의 결합이 이루어질 때 그것이 곧 지혜문학이 된다는 점이다. 그러한 결합을 가지고 있지 않은 본문은 많게든 적게든 성경의 지혜에 참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1]

이러한 다양한 지혜에 관한 접근 방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스라엘의 지혜 전승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그 결론을 맺고 있다. 이번 지혜문학 강의의 Final Paper 를 작성하며, 본 주제에 관하여 각 지혜 문학서들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또 많은 학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알아보려 한다.

전도서12:9-14은 전도서의 결론 부분으로 전도서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다. 이 구절을 통해 전도서를 읽는 독자들이 전도서가 회의주의를 주입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 가장 의미있고 보람 있는 삶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부분을 기록하였음을 이해한다. 특히 13절에서는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지혜의 목적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보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2]

특별히 전도서는 타락한 세상, 그러기에 자주 혼돈하고 뒤틀린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전도서에서는 타락의 비극적 현실, 인생의 헛됨, 죄와 죽음, 일의 기쁨과 좌절, 그리고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감사하며 누림 이라는 큰 주제들를 가지고 전체적인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고 있으며, 그 결론으로 ‘모든 것이 헛되다’ 는 사실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 피난처를 구해야 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공경할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전도서의 코헬렛, 즉 전도자는 때로는 솔로몬 왕처럼 자신을 묘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자신을 신격화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허망하고 헛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이 참된 진리이며 지혜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며, 독자들에게도 그렇게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신약으로 가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코헬렛이 겪었던 허무와 헛됨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이 세상의 헛된 것에 굴복시킴으로써 우리들을 코헬렛의 허무한 세상으로부터 구원해내셨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세상의 허무로부터 구원해내시기 위해 이것을 경험하셨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성부께서 그를 버리셨다. 이 순간 그는 코헬렛조차도 상상치 못할 방식으로 저주 아래 있는 세상의 허무를 경험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3:13).

그 결과 기독교인들은 코헬렛이 가장 고통스러워 한 것들 속에서 심오한 의미들을 경험할 수 있다. 예수는 지혜, 수고, 사랑, 삶의 의미를 회복시키셨다. 결국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예수께서는 코헬렛이 가장 크게 두려워한 것을 정복하셨으며, 사망이 모든 의미있는 것들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입구라는 것을 보여주셨다.[3]

레이몬드 딜러드와 트럼퍼 롱맨은 ‘최신구약개론’ 전도서 편에서 코헬렛과 신약을 연결 지으며 지혜자인 코헬렛 조차도 극복하지 못했고, 그 안에서 고통 받을 수 밖에 없었던 허무와 헛됨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코헬렛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의 절망을 아주 생생하게 포착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적으로 들리지만 현대 세상은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을 믿지 않지만 코헬렛은 하나님의 존재는 믿으면서도 그의 사랑과 관심은 의심했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욥기는 경건한 자의 생애에 있는 고통과 재앙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왜 의로운 자가 고난을 받는가 하는 문제를 대답하기 위하여 이것은 쓰여졌다. 그 답은 세 가지 측면에서 제시된다. 1) 하나님은 그가 베푸신 복을 떠나서까지도 우리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경건으로 정화시키고 강화시키는 수단으로써 고난을 허락하실 수 있다. 3) 하나님의 뜻과 길은 미소한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깊고 크시므로 사람은 전능자의 넓이와 폭을 가지고 인생의 문제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자신의 영광과 우리의 궁극적인 선을 위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알고 계신다.[4]

욥기는 의로운 사람 욥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을 당하고, 세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재앙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것이 왜 왔는지를 논쟁하며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특별히 마지막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까지, 세 친구와의 논쟁만 이어질 뿐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침묵하고 계시는데, 그 논쟁과 욥이 겪는 마음의 고통이 있은 후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생각과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기상학적 차원에 있어서의 물리적인 우주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들에 대한 지적인 이해를 가질 때까지는 섭리에 대해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주지 시키시며 하나님의 우주에 대해 기초적인 것마저 알 수 없는 충분한 해석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결국 욥기에서도 그들은 여러가지 방법들로 자신이 갖고 있는 지혜를 선포하며 이야기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무지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였던 욥이 다시 높임을 받으며, 그의 삶와 행동을 통해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잠언의 길, 다시 말해 실제로는 인생의 길을 걸어 갈 때 직면하게 되는 양 대안을 분명하게 보게 되었다. 우리는 야웨를 껴안거나 다른 신을 껴안게 된다. 누가 그가 될 것인가?

이것은 실제로 고대의 이스라엘이 직면한 상황이었다. 그는 야웨 숭배나 바알 신앙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많은 이들은 양자를 혼합하고자 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이러한 타협은 우상숭배나 마찬가지임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야웨 혼자만을 선택하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실제 상황은 바로 잠언 9장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두 개의 대안을 갖고 있었다. 잠언 1-9장은 잠어서 마지막 장의 절정과 더불어 이러한 선택의 길을 강인한 인상을 주는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5]

잠언 역시 마찬가지이다. 잠언에서는 ‘지혜있는 자’라고 불리는 집단, 아굴, 르무엘 왕, 그리고 솔로몬 등이 지혜서의 원천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 다양한 형태의 지혜를 추구하는 이들이 무엇이 진정한 지혜인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잠언 속에서 솔로몬의 역할이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아 온 이유는 이 책의 상당 부분이 그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의 표제 역시 언뜻 보기에는 그가 이 책 전체의 저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어떤 부분은 솔로몬 이전의 것이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솔로몬과 전혀 상관이 없는 부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잠언에서 이야기 하는 최종적 지혜는 무엇인가? 잠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적으로 안고 있었던 하나님과 바알을 섬겨야 하는 선택을 생동감 있게 전달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것이 참된 지혜이며 그것만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종노릇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임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신학의 과제는 신약과의 특별한 관계 및 좀더 큰 근동 세계의 종교와 본질적 관계를 항상 염두에 두는 가운데 구약 신앙의 세계를 전체적으로 묘사하고 구약의 사상 세계의 횡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을 하나로 묶는 위대한 사실은 자신의 왕적인 통치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세상 속으로 하나님이 돌입한다는 사실이다.[6]

지혜에 대하여 논할 때 단순히 구약에 있는 지혜서들만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문제와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지혜를 연결시키는 것 자체는 정당하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를 육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지혜는 신약에서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중의 하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시다. 그는 그 속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는 분이시다. 그가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에도 그의 지혜는 그의 가르침을 통하여 드러났다. 어렸을 때 그는 율법 교사들을 당혹하게 하였으며 그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랐다. 그의 가르침 중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양식은 비유 즉 잠언이다.

지혜문학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경외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 페이퍼를 작성해 나갈 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가르치실 때에나 논쟁하실 때에도 자주 구약의 내용들을 인용하여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지혜 문학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지혜서 몇권에만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을 시작으로 신약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동일한 내용을 연결짓고 있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이 말하고 행할 수 있는 지혜의 결정판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 앞에 순종하신, 그분에게 모든 삶을 통해 경외함을 표출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였다.

사실, 지혜문학의 사상은 창조사실에 기초를 둔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보다 넓은 차원에서, 기존관계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의 행위의 속성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함’이다. 이 여호와 경외는 여호와에 대한 심리적 혹은 감정적 반응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이스라엘이 이미 알고 있었던 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세워진 언약관계라는 틀 안에서의 온전한 헌신을 의미한다. 그러한 경외의 반응은 토라에 대한 반응이요 율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때, 성경 시대 마지막까지 밝히 드러내지지 않았으나, ‘율법’과 ‘지혜’를 동일시 함은 처음부터 임시적으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였다.[7]

W.J.둠브렐이 ‘언약과 창조’라는 저서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지혜문학의 기초는 성경적 신학에 있었으며, 성경이 율법과 지혜를 동일시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았을 때,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떤 다른 표현보다도 여호와에 대한 경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약을 율법과 지혜와 함께 연결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 22:12에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기꺼이 드렸을 때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 안에서, 요셉의 믿음의 응답 안에서 그리고 특별히 욥기서에 증명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질적인 삶으로서 드러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나아갈 때에만 온간 대상과 세계 자체를 이해할 수 있는 바른 관계 안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했을 때 그들은 악을 피했다. 사실 그들은 악을 미워하였고 정직하게 행하며 패역하게 행치 않았다. 이러한 형태의 삶의 경과는 장수였으며 재물과 영광의 증대였으며 안전과 보호였다. 축복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삶이 갖추어야 할 특성과의 관계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이스라엘의 구속 과정에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어의 전체 의미에서 볼 때 모든 인류에게 은총의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축복의 행위 중의 하나였다.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세상을 조성하신 바로 그 지혜를 그의 지혜로서 남자와 여자에게 주셨다. 그 지혜 없이는 인간은 효율적인 지도력이 없는 하나님과 인간과 사물을 인식하거나 이해 못하는 불능자이다. 사실 삶 그 자체는 의미가 없으며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길을 인도할 때 그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이다.[8]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지혜 문학에서 지배적인 개념, 그리고 사상이며, 신학적인 원리였음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과 모세 시대에 작용하였던 바와 같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었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사용하셨던 그 지헤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인해서, 단순히 많이 먹고 즐기며 살아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며 경외하는 삶으로 인해 가장 인간답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영원히 지속되고, 하나님은 자기 안에 피하는 자들에게 ‘반석’이 되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사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공경할’것을 촉구한다.[9]

다시 전도서로 돌아와 이 페이퍼의 마무리를 짓고 싶다. 인간의 삶 속에서 추구하고 노력하는 것들은 결국에는 허무였다. 나는 그것을 나의 삶을 통해서, 또 여러가지 뉴스 기사들과 문학 작품, 그리고 과거에 살았던 이들의 삶을 통해 배웠다. 그리고 그 허무는 오늘날 더 크고 강력한 힘으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번 지혜 문학 강의를 들으며, 그리고 특별히 이번 마지막 페이퍼를 정리하면서, 나의 삶을 복되고 충만하게 하는 것이 멀고 힘든 일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앞서 나누었던 지혜문학서에 나타나는 수 많은 이들이 찾으려 노력하였던 그 지혜, 그리고 그것을 차지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지혜가 먼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앞서 지혜 문학을 연구하고, 지혜 문학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떠한 삶인지에 대해 이야기 해준 여러 신학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느낀다. 또 내가 배운 이 지혜가 단순히 학과목의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또 그 지혜를 통해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도구로 사용되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하는 것이기에, 지혜란 창조주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되었다.

[1] 제임스 L. 크렌쇼, 구약 지혜문학의 이해, pp. 25

[2] 김영진, 삶의 의미를 찾아서, pp.174-175

[3] 레이몬드 딜러드 & 트렘퍼 롱맨, 최신구약개론, pp. 385

[4] 글리슨 L. 아처, 구약총론, pp. 658

[5] 레이몬드 딜러드 & 트렘퍼 롱맨, 최신 구약 개론, pp. 366

[6] 로버트 덴탄, 구약 신학 입문, pp. 59

[7] W. J. 둠브렐, 언약과 창조-구약 언약의 신학, pp. 313-314

[8][8] 월터 카이저, 구약 성경 신학, pp. 233

[9] 부흥과 개혁사, ESF Study Bible, pp. 1269-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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